왜 살아야 하는가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자전적 형식의 소설, 현재를 붙들어 놓을 수 없다는 사실과 과거를 돌려받을 수 없다는 사실, 그것들로 인한 상실감과 회한을 다룬다. 젊음과 사랑은 필연적으로 떠나가며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현실을 직시해라.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대처해야 한다.
결국 이 책은 해방과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소설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음으로써 죽음 자체까지 극복할 수 있는 [예술과 창의력의 위력] 에 대한 소설이다.
@아름답다! 홍차와 마들렌 !!
.영혼은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무언가를 찾고자 하나, 모든 쾌락은 일시적이다. 그러므로 쾌락은 지속적인 무언가를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 @ 지속적인 쾌락을 찾겠읍니다. (농담)
. 우정과 사랑은 모두 낭비다! 우리는 사랑에 빠질 때면 사랑하는 대상에게 그것이 실제로 지니지 않은 성질을 투영한다.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중요하다고 착각한다. @’착각’이라는 말이 조금 거슬렸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아름답고 소중한 게 아닐까? 나태주 시인을 떠올려 보자
.사랑이 낭비인 이유 2. 우리는 그 대상에게 가까워 지려고 노력하지만, 우리가 뭘 하든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알 수 없다. @ 그 사람의 모든 걸 알 수 없다는 이야기. 그래도 사랑하면 꽤나 많은 걸 알 수 있다. 그만큼 가깝다는 의미니까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밀감은 모두 환영에 불과하다.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며, 타인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고 우리 역시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우리는 절대 ‘완벽히’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다. 모든 공감과 위로는 ‘연기’나 ‘가식’ 정도에 불과하다.
. 결국 우리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혼자’다 @ 꽤 슬퍼도, 이것만큼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실제 세계의 인물들은 우리가 결코 닿을 수 없다. 우리가 인간을 비롯한 사물에게 발견하는 모든 아름다움은 사실 우리 내부, 우리의 상상 안에 존재한다. 현실은 우리를 실망시킨다. 타인을 오롯이 이해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정한 현실’이 존재하는 예술에 집중해야 한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은, 사물의 본질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도록 만든다. 우리 내면을 들여다 보게 하기 때문에. @ 실제의 현실은 우리가 닿을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예술로써 세계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음.
. 사랑은 우리 속에서 생겨나며, 주변에 사랑할 사람이 없더라도 존재. 사랑의 대상은 우연이다. 만약 우리가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른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것. 고로 사랑은 이기적인 쾌락이다.
.그럼에도 사랑은 우리이 ㅅㅁ겨진 모습들을 드러내 준다는 사실에서 중요하다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역설적이게도 소유하고 나면 상대는 더 이상 예전에 소유하기를 원했던 그 대상이 아니게 된다. 우리가 소유하기를 갈망하는 그 무언가는 소유하고 있지 않을 때만 그곳에서 존재한다. @매력의 유지 – uncontrolable / 이혼이 잦아지는 이유도 이게 아닌가? ㅋㅋ
.죽은 사람에 대한 애착이 희미해지는 이유는, 그들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죽어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 존재하기를 원하기에 상황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럴 수 없ㅇㅁ. 우린 매 순간 소멸하고 다시 생성된다. @ 불교!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 이미 수 만 번 죽었기 때문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최상의 방법 중 하나는 멀리서 봤을 때 아름답고 신비하게 보이는 대상에게 충분히 다가가서 아름다움과 신비가 사라질 때까지 한껏 즐기는 것이다. @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많은가.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따고 느끼는 순간들 – 생과 멸이 반복되는 와중에 보이는 풍경. “잃어버렸던 대상을 다시 인식할 때” = 어떤 일련의 경험을 통해 잃어버린 과거의 자아를 다시 찾아낼 때 =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순간 // 홍차와 마들렌! 주인공은 홍차와 마들렌을 먹으며 옛 기억을 찾아내고, 강렬한 기쁨을 느낌
.기억은 시간이 소멸시킨 대상을 찾아 그 대상에 숨결을 불어넣음. 지극히 사소한 동기에 의해 촉발된 기억은 죽어있던 자아(과거의 자아)를 다시 현재에 존재하게 한다.
.삶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 – 예술
무엇이든 그 중심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진리가 있다. 누구나 때때로 어렴풋하게 그 진리를 인지할 수는 있으나, 오직 예술가만이 그 진리를 추출해 앞에 보여줄 수 있다. 예술가는 보이지 않는 걸 탐구한느 사람들. 그들은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을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 바꿔 놓는다.
예술은 일반적인 방식을 통해 전달될 수 없는 것들을 전달한다. 예술은 ‘개별적인 인간’에 대ㅐ 알린다. 우린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예술은 그 역할을 한다. 사랑이나 우정이 결코 이루지 못할 일을 한다.
.예술은 고통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 “살아가는 기술이란 우리가 고통의 신성한 형태를 받아들이고 일상을 신성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모든 고통이 예술의 경험이 된다. 경험이 예술로 승화되지 않는다면 그 시간은 낭비된 시간이다.
.사소해 보이는 감각에 자극을 받는다 – 과거가 눈 앞에 나타나 현실과 합쳐짐 – 과거나 현재보다도 더욱 본질적인 순간 – 그 자체로 죽음은 나와 상관없다고 느끼게 한다.(즐거운 확신) – 예술은 그런 장면을 ‘모방’한다.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함으로써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느껴지게 한다. 그러면 사물에 숨겨진 영속적이고 고유한 본질이 풀려나고, 우리의 진정한 존재가 활기를 찾는다. ‘ 진정한 존재’ 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을 시간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존재는 과거와 현재의 동일성이라는 매개를 통해 존재하면서 사물의 본질을 즐길 수 있는 환경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 노트엔 도대체 뭔 소린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적혀 있는데, 지금 다시 본 결과.. 우리는 매 순간 죽기 때문에 그걸 인지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추억을 회상하는 건 이미 죽은 자아를 불러와 현실에서 인식하는 것. 우리가 (실제로) 죽고 나서, 추억으로 다시 되살아 날 수 있기에 두려어하지 않는다는 의미일까?
그리고 노트에 적힌 나름의 결론 : ‘잃어버린 시간’은 아마 과거의 기억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걱정하고 괴로웧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수도 없이 죽어와서 두려워할 핑료가 없다 (잃어버린 시간들)그럼 죽음은 해결,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해결이 안됨. 처음엔 그걸 외부 세계에서 찾고자 했다. 사랑과 우정 등등. 근데 이게 영 아니다. 영속적이지도 않고. 프루스트가 보기에 우리가 여기서 얻는 위안은 모두 착각이다. 그럼 외부에서 못 찾으면, 내부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러다 마주한 홍차와 마들렌! 홍차에 마들렌을 적셔 먹으며 ‘잃어버린 과거’의 자아를 다시 마주한다.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자아가 현재에 다시 존재하는 경험. 예술은 그런 장면을 모방하고, 우리는 결국 예술로써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
작가는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두려워했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예술을 택했음. 100년이 지난 뒤에도 우리는 그가 남긴 예술(소설) 을 통해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죽음을 극복했다는 의미.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창조가(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23년 10월 22일 추가. 맞는 말 같다.